컨텐츠상세보기

불처럼 바람처럼 함께 가는 길 (커버이미지)
알라딘
불처럼 바람처럼 함께 가는 길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이동주 
  • 출판사현대시문학 
  • 출판일2022-06-15 
보유 1,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0, 누적예약 0

책소개

불과 바람과 암호화된 전언
- 양태철(현대시문학 발행인, 문학평론가)


이동주 시인의 시집 <불처럼 바람처럼 함께 가는 길>에는 수많은 삶이 존재한다. 삶속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반목과 폭력 그리고 자존심을 높이 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동주 시인은 화해와 평화를 외친다. 특히 목회자로서 중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삶의 희로애락을 시로 표현한다. 그 중심은 그리스도의 삶을 느끼게 하여 종국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집 속에는 1부 삼행시와 2부 디카시 그리고 3부 커피 관련 시가 꽃밭처럼 화원을 이루고 있다.

이동주 시인의 시에는 기본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비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관계가 잘 성립되어 있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다.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다. 비유의 표현 중에서 ‘~같은, `처럼’이라는 접미사가 있다. 이 조사를 쓰는 문장을 직유가 가미된 문장이다. 직유의 표현이 발전하면 무엇일까? 바로 은유이다. 직유가 유사한 두 사물을 비유한다면 은유는 유사하지 않은 두 사물을 동일시하게 된다. 따라서 시에서 직유보다 은유가 더 소중한 이유는 ‘감춤의 미학’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은유는 직유에 비해 신비한 느낌을 준다. 숨길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원리인 것이다.

<꽃 같은 여인>이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면 ‘여인’이 원관념이고 ‘꽃’은 보조관념이다. 보조관념인 꽃에 빗대면 여인의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즉 창작을 할 때 쉽게 오류로 쓰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시각적 이미지로 구체화하면서 시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상징은 어느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표시하거나, 본래의 의미 외에 다른 의미로 나타내는 표현 기법이다. 그래서 상징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을 지닌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1대 1의 유추적 관계로 보지만, 상징은 1대 다수의 다의적 관계로 본다. 이렇듯 비유와 상징은 근본적으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비유는 그 구조가 아무리 복잡해도 원관념에 해당하는 뜻을 파악할 수 있으나, 상징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솜이불을 덮고 선 겨울나무’라는 표현에서 솜이불의 원관념은 ‘눈[雪]’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님’은 연인이나 조국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형도 시인의 시, <빈 집>을 보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에서 마지막 전 행에서 직유의 표현이 있는 문장인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는 문장을 은유로 바꾸면, ‘나 장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로 표현될 것이다. 직유의 표현이 좋은지 은유의 표현이 좋은지의 선택지는 화자의 몫이다.

이제 마지막 연의 ‘빈 집’이란 무엇을 상징하는 말인가? 정답은 ‘사랑을 잃은 마음’이다. 즉 가족들이 사랑하고 행복했다가 슬프기도 했던 따뜻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비어있는 집을 표현한 내용이다. 이렇게 원관념은 나타내지 않고 ‘빈 집’이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보조관념만 나타내는 것을 상징(symbol)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법과 같으며 직유와 은유는 두 사물을 비교하고 비교되는 두 사물이 시에 나타나지만 상징은 원관념을 감추어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직유에서 은유로, 은유에서 상징으로 나아가면서 감춤은 깊어진다. 그래서 임보 시인은 상징을 ‘고급 위장술’이라고 표현한다.

조금 더 풀이를 해보자, 김수영의 시, <풀>에서,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뻘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에서 ‘풀’이 눕고 또 울다가 눕는 것은 어두운 현실에서 살아야만 하는 민중의 삶을 비유한다. 하지만 흐린 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지배세력의 횡포이며 결국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강인한 민중의 생명력을 ‘풀’의 이미지를 매개로 노래한다. 그러니까 김수영의 시, ‘풀’은 ‘풀과 바람’만 겉으로 드러나고 원관념인 ‘민중’이 생략된 감춘 구조인 것이다. 즉 은유적 표현이다. 이렇게 은유는 원관념이 하나이지만 ‘빈 집’의 상징적 표현은 ‘다수의 원관념’을 갖는다. 따라서 상징은 다수의 원관념을 갖게 되어 추정이 어렵고 모호하다. 그 만큼 상징은 풍부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동주 시인의 시집에서 문을 여는 시가 <열쇠>이다.

비틀리고 꺾여야만 열리는 세계
우직하게 밀고 나갈수록 저항하는 경계
너 한번이라도 몸 뒤틀리도록 화해한 적 있는가
- 이동주 시, 『열쇠』 전문

이 시는 철저한 위장술을 발휘하여 상징을 표현한다. 원관념은 ‘화해’이거나 ‘자존심을 없애는 행위’ 등이다. 확대해석해 보면 세계정세로 볼 때, 미국과 중국의 갈등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모두 서로가 화해하지 못하고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으로 확대하면 개인 간의 갈등과 반목 역시 그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고 결국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 싸울 상황에서 누군가 열쇠역할을 한다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예언자적 시야가 커 보인다. 화자는 세상을 살아갈 때 열쇠라는 보조관념을 통해 원관념을 다의적으로 유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열쇠라는 보조관념만을 부각시켜 원관념을 감추어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비틀리고 꺾여야만 열리는 세계’는 잘못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 중 한 쪽에서 비틀리지 않고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직하게 밀고 나갈수록 저항하는 경계’에서 화해보다는 지배를 통한 압제를 하게 되면 당하는 민중은 화해를 포기하고 경계를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서로 반목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인 것이다. 이럴 때 화자는 ‘너 한번이라도 몸 뒤틀리도록 화해한 적이 있는가’라고 화두를 던진다. 양측의 반성을 자각하게 하고 세상을 온전히 살기위해서는 지배세력과 민중의 화해가 가장 중요하다는 고도의 상징적 표현으로 마무리 한다. 본 시집의 저자는 목회자여서 그런지 그의 시를 통해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이 연상된다.

참고로 현대시는 직유보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은유를 많이 쓰고 있다. 시 창작 시에는 무엇보다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참신한 비유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많이 사용하는 진부한 상징을 사용하면, 자칫 모방 시로 보일 수 있다.

이동주 시인의 시에는 심상心象이라고 부르는 온갖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시를 쓸 때 먼저 주제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주제는 ‘사랑, 희망, 의지, 그리움’ 등이 있다. 이것을 모두 <추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추상적이라는 것은 감각적 경험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랑을 하는데(추상적 이미지) 이것을 표현할 때 <난 널 사랑해, 사랑한다구>라고 표현하면 시가 될 수 없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가슴에는 와 닿지 않는다. 이런 것을 구체화, 형상화를 해야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와 닿게 표현하려면 <경험제공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공감共感>인 것이다. 그래서 와 닿는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시는 감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감각이 바로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다. 시는 감각적 이미지로 이루어져있다. ‘아이들’이나 ‘아이들이 지나간다’라고 표현하면 그 자체가 <시각적 이미지>이지만 ‘사랑’은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간다’라고 표현하면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느껴진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청각적 이미지>가 강조된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김종길 시, <성탄제>는 <촉각적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피부를 통해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산에 가면/ 우거진 나무와 풀의/ 후덥지근한 냄새.// 혼령도 눈도 코도 없는 것의 흙냄새까지 서린/ 아, 여기다, 하고 눕고 싶은/ 목숨의 골짜기 냄새’ ? 박재삼 시, <산에 가면>는 코를 통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후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동주 시인의 커피에 관한 관심은 특별하다. 그래서 그런지 커피라는 미각을 느낄 수 있는 맛과 냄새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후각의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이미지를 생각하여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면서 느끼는 촉각적 이미지를 이동주 시인은 맛깔스럽게 표현한다.

해뜨기 전 기찻길 옆 삼거리?
그가 무뚝뚝한 점원처럼
가로등 아래 서 있습니다

?꿀꺽꿀꺽 받아 삼키는 ?
가냘픈 그의 입은 늘 불 꺼진 주방
허기진 동굴입니다

?오늘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님 하나 천연덕스럽게 맞이합니다
나는 아침마다 목이 마를 때면
스테인리스로 입힌 그의 얼굴을 더듬어?
백 엔짜리 십 엔짜리 동전을 넣습니다

?어둠속을 굴러가는 또르륵 외마디
힘차게 버튼을 누르면 일제히
불 밝히는 오징어잡이 집어등, 빛
잠이 덜 깬 보스*를 훤히 비춥니다

?팔딱거리며 갑판위에 떨어지는 물고기커피
무의식적으로 일하는 자동 컨베이어처럼?
자판기가 손님 한사람 맞이하고 포효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집니다?
고객은 안중에 없다는 듯
무언의 지시만 따르며
일찌감치 조업을 끝내버립니다

?어서 오라 고맙다 또 만나 한 마디 없이
조용해진 이 순간,
오랜 외면과 정착하지 못한 거류민으로서
국경을 앞에 두고 건너지 못하는 사슴처럼
목을 늘어뜨린 자이니치**의 투쟁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흘러가는 것일까
등보이고 사는 구부러진 새우의 삶 같은
때마침 기차 한줄 서럽게 울며 지나갑니다

?가슴을 후비는 뜨거운 불덩이?
난민이 난민을 위로하는 아이러니
오직 뜨거운 캔 커피만 숨 쉬는 이 땅
안녕, 너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검은 슬픔이 검은 한숨을 들이킵니다?
- 이동주 시, 『디아스포라』전문
?
이동주 시인의 디아스포라는 현재 일본에 살면서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비난이 여전한 가운데 살고 있는 모습이 곧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뜻이다. 디아스포라의 접두어인 디아(dia)는 <너머>라는 뜻이고, 스포라(spero)는 <씨를 뿌리다>를 뜻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집단이나 거주지를 말한다. 즉 한국인이지만 일본에 살면서 그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물론 요즘 인기가 있는 이민진 소설가의 이야기인 <파친코>는 식민지인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한인들의 쓰린 삶을 표현하여 드라마 하였다. 이 이야기 역시 디아스포라이다.
이동주 시인의 시, <디아스포라>의 감각적 이미지를 살펴보자. 1연의 ‘해뜨기 전 기찻길 옆 삼거리?/ 그가 무뚝뚝한 점원처럼/ 가로등 아래 서 있습니다’에서는 기찻길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곧 들리게 될 기차소리가 주는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며 무뚝뚝한 점원과 가로등이 서 있는 모습을 비추며 시적 도입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2연의 ‘꿀꺽꿀꺽 받아 삼키는/ ?가냘픈 그의 입은 늘 불 꺼진 주방/ 허기진 동굴입니다’에서는 <미각적 이미지, 시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충분히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한다. 특히 ‘가냘픈 그의 입은 늘 불 꺼진 주방’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맛깔스럽다. 또한 3연의 ‘?오늘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님 하나 천연덕스럽게 맞이합니다/ 나는 아침마다 목이 마를 때면/ 스테인리스로 입힌 그의 얼굴을 더듬어?/ 백 엔짜리 십 엔짜리 동전을 넣습니다’에서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를 활용한다. 물론 감각적 이미지의 성공을 엿볼 수 있다. 4연의 ‘어둠속을 굴러가는 또르륵 외마디/ 힘차게 버튼을 누르면 일제히/ 불 밝히는 오징어잡이 집어등, 빛/ 잠이 덜깬 보스를 훤히 비춥니다’에서는 자판기의 불빛이 마치 오징어잡이 집어등과 같고 그 불빛이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빛으로 비추는 모습으로 <촉각적 이미지,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희망으로 비약된다. 5연의 ‘팔딱거리며 갑판위에 떨어지는 물고기커피/ 무의식적으로 일하는 자동 컨베이어처럼?/ 자판기가 손님 한사람 맞이하고 포효합니다.’에서는 팔딱거리는 ... 물고기커피로 비약적으로 비유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한다.
6연의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집니다?/ 고객은 안중에 없다는 듯/ 무언의 지시만 따르며/ 일찌감치 조업을 끝내버립니다’에서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를, 7연의 ‘어서 오라 고맙다 또 만나 한 마디 없이/ 조용해진 이 순간,/ 오랜 외면과 정착하지 못한 거류민으로서/ 국경을 앞에 두고 건너지 못하는 사슴처럼/ 목을 늘어뜨린 자이니치**의 투쟁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에서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를 역시 활용한다. 8연의 ‘산다는 것은 흘러가는 것일까/ 등보이고 사는 구부러진 새우의 삶 같은/ 때마침 기차 한줄 서럽게 울며 지나갑니다’에서도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터를 잡고 살기가 팍팍한 삶의 여정을 표현한다. 마지막 연에서 ‘가슴을 후비는 뜨거운 불덩이?/ 난민이 난민을 위로하는 아이러니/ 오직 뜨거운 캔 커피만 숨 쉬는 이 땅/ 안녕, 너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검은 슬픔이 검은 한숨을 들이킵니다’에서 <미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윤동주 시인이 생각나고 파친코가 생각나고 어려운 한일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한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처연해 진다. 그의 시집 상재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문운과 기쁨이 가득하길 바래본다.

한줄 서평